
“빠른 개혁이 가장 좋은 개혁이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지난 6일 간담회에서 연금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내뱉은 발언이다. 콩을 볶는 최고의 방법은 번갯불로 볶는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하다. 연금개혁이 시급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빨리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적어도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기금은 약 1200조원이지만, 약속된 연금액은 현재가치로 이미 3천조원을 넘어섰다. 2천조원이나 부족하다. 왜 이렇게 부채 규모가 클까?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기형적인 구조가 오랫동안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에 발표된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현행 국민연금 보험료율 9%에 대하여 투자 수익까지 고려해 정상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연금액, 즉 수지균형 소득대체율은 18%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두배가 넘는 40%의 소득대체율을 약속하고 있다. 만약 월 100만원의 국민연금을 수령한다면, 그 중 자신이 낸 보험료에 대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연금은 40만원에 불과하고 부지불식간에 나머지 60만원은 자녀세대의 돈을 갈취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1차 연금개혁에서 70%였던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췄고, 노무현 정부의 2차 연금개혁에서는 60%였던 소득대체율을 다시 40%까지 낮췄다. 기형적인 적자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었고, 미래세대의 부채를 줄인 성공적인 개혁들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러나 소득대체율 40%도 여전히 적자 구조임에는 변함없다. 예산정책처의 추산에 따르면 소득대체율을 1%p 인상할 때마다 미래세대의 부채는 현재가치로 약 300조원씩 증가한다. 현재 소득대체율 40%는 수지균형 소득대체율 18%보다 약 22%p 높으므로, 이대로 가만히 두면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국민연금 부채는 앞으로 6,600조원 가량 추가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대체율을 줄이면 줄였지 높이려는 시도는 가당치도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사이, 이기일 차관은 대통령의 4대 개혁 과제 중 하나였던 연금개혁을 ‘여야 합의로 적당히 빨리 해치우자’며 서두르고 있다.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13%로 인상하는 것에는 여야가 이미 합의한 바 있기 때문에, 쟁점은 소득대체율이다. 여당은 소득대체율 0~3%p 인상안을, 야당은 소득대체율 4~5%p 인상안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보험료율 13%에 대한 수지균형 소득대체율은 26%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더 인상하자는 안은 연금개악에 불과하다.
지난 2월 25일 개최되었던 국민의힘 연금개혁 청년간담회에서, 한 여당 국회의원은 소득대체율을 단 1%도 올려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지난 6일 열렸던 여야협의체에서 여당은 결국 민주당 측에 소득대체율 43% 안을 제시했고, 지난 10일 민주당은 그조차도 거절하며 협의를 결렬시켰다. 당황스러운 것은 국민의힘이 타협안으로 제안한 43% 안은 민주당이 주장한 44% 안과 미미한 차이일 뿐 미래세대에 1,000조원 가량의 부채를 지운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작년 초 21대 국회에서, 제대로 된 개혁안이 아니라며 대통령이 끝끝내 반대했던 안이기도 해서 더더욱 당황스럽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된 사이, 보건복지부 이기일 차관은 '빠른 연금개악보다는 제대로 된 연금개혁'을 바랬던 대통령을 비판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그저 자신의 임기 가운데 무엇이라도 법을 개정해서 자신의 업적으로 삼고 싶었던 걸까?
여야협의가 결렬되며 여야가 소득대체율 43%와 44%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무엇이 되었든 만약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연금개혁안이 합의된다면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미래세대를 착취한 공범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지난 2월 19일 시행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높여야 한다는 응답은 19.4%에 불과하여 현상 유지하거나 줄여야 한다는 응답 58.8%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국민들 대다수는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빚을 지우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국회는 미래세대를 위하는 것도 아니고, 국민 여론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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