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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클리블랜드: 두 가지 관세 전략 이야기

 

*편집자주

해당 기사는 리즌의 매튜 로즈가 작성한 칼럼을 번역한 기사로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과거 그로버 클리블랜드 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대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곧 미국 역사상 비연속 임기를 지내는 두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트럼프와 비연속 임기를 지낸 첫 번째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제22·24대 미국 대통령)를 비교하게 한다.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이러한 대조는 교훈적이면서도 잔혹하게 아이러니한 면모를 보인다.

 

트럼프는 관세 인상을 자신의 핵심적인 경제 정책으로 삼았다. 반면 클리블랜드는 높은 관세가 미국에 특정하고 위험한 유형의 공산주의, 즉 부도덕한 부의 공산주의를 가져온다고 경고하며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바쳤다.

 

'부도덕한 부'라는 말은 소위 부정직하거나 불명예스러운 방법으로 획득한 돈을 지칭하는 용어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클리블랜드의 사상을 설명하기에는 완벽한 단어다. 그는 1894년 토마스 캐칭스 전 하원의원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한 트러스트(기업합동) 및 조합, 즉 부도덕한 부의 공산주의는 잊히거나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세 개혁에 대한 가장 중요한 클리블랜드의 성명은 1887년 12월 6일에 의회에 제출된 연방 연설이었다.

 

클리블랜드는 관세 개혁을 매우 강력하게 믿었기 때문에 1888년 재선 캠페인 전체를 관세 인하에 관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헌신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경제적 이슈를 통해 그가 경고했던 일들이 사실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1892년 결정적으로 재선되었다.

 

클리블랜드는 관세가 너무 높으면 부패한 정치인과 사업가들이 소비자를 착취할 수 있으며, 종종 가격 인상을 통해 서민들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가 모든 시민들을 법 앞에 평등하게 대우하지 못하고, 대신 앞서 언급한 '부도덕한 부의 공산주의' 내부에서 승자와 패자를 골라낸다는 것이다.

 

이는 남북 전쟁 중, 그리고 그 이후에 미국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상황이다. 당시 정치인들은 국가가 급성장하는 기업 커뮤니티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무거운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처음에는 추가적인 세금을 전시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였지만, 신생 군산 복합체가 축소된 이후에도 높은 세율은 지속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간단하면서도 다루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높은 관세를 통해 이익을 얻는 수천 개의 제조업, 농업 등의 다양한 산업들이 존재했고, 각 특수 이익 집단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복지 정책에 관해서는 무시했고, 그 결과 정부는 1886~1887년에만 1억 1300만 달러라는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클리블랜드가 처음부터 관세 개혁을 우선시 했던 것은 아니었다. 1885년 첫 취임 이후 클리블랜드는 2년 반 동안 정부의 부패를 근절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정부 부패는 1873년 마크 트웨인이 남북 전쟁 이후의 시대를 '황금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극심했다. 클리블랜드의 부패 방지 정책이 '재정 낭비적인 입법에 대한 거부권'을 포함했다면, 그는 간접적으로 보호무역주의의 나무에서 자란 썩은 열매를 따먹은 셈이다.

 

그러나 1887년이 되어서야 그는 광범위한 관세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대통령직과 미국을 변화시켰다. 클리블랜드는 의회에 보낸 서한에 보호무역주의자들이 내놓은 다양한 민족주의적 주장을 언급하여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이론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현명한 결론으로 진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직면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클리블랜드는 보호무역주의자들을 상대로 적당한 관세 인하를 제안하면서,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원자재 접근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연방 정부의 재정적 의무는 사치품(특히 '담배와 술')에 부과되는 내부 수입세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이와 같은 메세지는 미국에 희소식이었다. 1887년 연두교서가 다음 해 국가 정치를 완전히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클리블랜드는 남북전쟁 이후 20년이 넘게 정책을 형성하는 데 약해진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그가 심각한 경제적 불의에 관한 인식을 높였다는 점이다. 

 

또한 클리블랜드는 민주당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민주당 내에서 관세 개혁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공화당도 정체성은 바뀌었지만, 그 방향성은 민주당과는 정반대였다. 실제로 하룻밤 사이에 보호무역주의를 중심으로 당을 재정의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클리블랜드의 관세 개혁안은 민주당이 장악했던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에서는 부결되었다. 더 안 좋은 소식은, 클리블랜드는 대중투표에서는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뉴욕과 인디애나 등 주요 주에서 선거인단 분쟁이 벌어지면서 1888년 선거에서 벤자민 해리슨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후 대통령이 된 해리슨은 고관세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의원직을 지내던 윌리엄 매킨리가 발의한 '고관세법'은 수입품에 대한 평균 관세를 50% 인상했고, 더글러스 어윈 다트머스 대학 교수가 1998년 입증했듯이, 이러한 고관세는 미국 내 저소득층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면서도 경제 성장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클리블랜드가 '물가 인하'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비연속 임기를 편안하게 이룰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트럼프와 달리 클리블랜드는 '관세를 인상하지 않고 되려 낮추겠다'는 지적인 해결책을 제안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클리블랜드와 당시 미국인 모두는 관세 개혁에 대한 이러한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93년 클리블랜드가 취임한 직후 미국은 경제 불황에 빠졌고, 클리블랜드는 관세 개혁에 착수하기 이전 여러가지 위기에 직면했다. 이후 1894년 관세 법안이 그의 책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당의 특수 이익 집단이 그것을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희석한 상황이었다. 결국 클리블랜드는 1894년의 관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자신의 서명 없이도 법이 통과되도록 허용했다. 더욱 비참한 것은 맥킨리와 공화당이 그들이 일으키는 경제적 비참함으로부터 정치적 이익을 얻었고, 민주당은 불황의 원인으로 비난을 받았다. 결국 맥킨리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클리블랜드가 주장한 관세 개혁은 1913년 '언더우드-시몬스법'이 제정되기 이전까지는 이뤄지지 못했다. 해당 법은 클리블랜드 정권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 대통령을 지낸 우드로 윌슨이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해당 법이 통과되기 5년 전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클리블랜드의 관세 개혁 어젠다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섰을 뿐 아니라, 보호무역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강력하고 시대를 초월한 경고를 했다. 클리블랜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제도에 관한 이론들이 모든 시민들에게 산업과 기업의 모든 결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를 보호하는 정부의 신중하고 경제적인 유지에 대한 그의 몫만 공제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변호할 수 없는 강탈이며 미국의 공정성과 정의에 대한 고의적인 배신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다른 잘못과 마찬가지로 국가 세금 부담을 지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이러한 잘못은 사악한 결과의 무리를 증가시킨다.

 

데일리인사이트 정성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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