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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샤피로, "착함만으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상위의 선을 전제한 도덕 체계는 '친절'을 강조
'친절'을 강조하지 않는 사회는 유지될 수 없어

* 데일리와이어의 편집자이자 유명 보수주의 오피니언 리더 벤 샤피로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칼럼의 Niceness는 '착함'으로, Kindness는 '친절' 親切로 번역했습니다.)

 

Undergirding niceness is kindness — but kindness and niceness are not the same thing.

착함의 기반은 친절이다. 하지만 친절과 ‘착함’은 다르다.

 

 누군가에게 착하게 군다(niceness)는 건 상대가 화낼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친절(kindness)하다는 건, 상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걸 말하는 게 친절이다. 마약중독자 친구가 있다면 “하던 대로 해”라고 말하는 건 착한 말이지만, 친절한 말은 아니다.

 

 아이가 반복적으로 나쁜 일을 한다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착하게 대하는 거다. 하지만 절대 친절한 건 아니다. 친절은 상위 가치의 선을 믿는 믿음에 기반한다. 친절은 판단을 필요로 한다. 친절한 사람은 판단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마약중독을 벗어나는 게 실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마약중독자에게 더 좋은 일이라고 판단해야만 한다. 어떤 행위가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책망하는 게 친절한 행위다.

 

 착한 일과 비교해보면 이런 책망은 못된 행위다. 착한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도덕 체계가 ‘친절’에 기반하지 않고 ‘착함’에 기반한다면 도덕 체계는 완전히 붕괴한다. 그리고 나서도 ‘착함’은 남는다. 물론 착함마저도 사람들이 착함을 착취하다보면 사라지고 만다. 착하게 대할 수 있는 건 얼굴에 주먹을 맞기 전까지다.

 

  착함도 오래갈 수가 없다. 공통된 도덕 체계가 없다면 친절이 착함으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의 착함을 이용하고 만다.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착함’의 최대 수혜자가 된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가 현실이 된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론에서 가장 혜택을 보는 사람은 착하지 않고 규칙을 깨는 사람이다. 착하게 행동하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마음대로 해버리고, 앞서나가 이긴다. 이를 본 사람들은 “나만 바보같이 착하게 행동할 순 없어, 나도 저 사람들처럼 행동 할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다 함께 망하는 길로 간다.

 

 투표 자료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원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화당원들은 민주당원들이 그저 ‘틀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략 2014년 들어서는 공화당원들도 민주당원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양쪽 모두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민주당원들이 공화당원들의 착함에 기대서는 사회 시스템에 친절이 강조되지 않는 현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착함 위에 사회를 세울 수 없다. 착함을 기반으로 기능하는 사회는 없다. 착함은 친절의 부산물일 뿐이다. 친절의 가치를 강조하지 않으면 행위자의 책임도 사라진다. 착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데일리인사이트 이재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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