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 생성
[이 글은 지난 2월 16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In Pursuit’에 기고한 글(https://inpursuit.substack.com/p/george-washington-by-george-w-bush?utm_source=publication-search)을 번역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을 돌아본다. 추앙받는 전쟁 영웅으로서 절대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던 인물, 그러나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으며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을 세운 지도자. 부시는 워싱턴의 겸손과 절제, 그리고 권력을 대하는 태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 정치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은 단순한 역사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래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기고문 전문 :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조지 워싱턴의 리더십에 대해 글을 쓰게 되어 참 기쁩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저는 역대 대통령들의 삶과 그들이 지닌 자질들에 대해 읽으며 큰 위로와 영감을 얻곤 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결단력, 해리 트루먼의 단호함,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의 낙관주의 등 여러 지도자들의 모습은, 미국이 그간 어떤 도전에 직면해왔는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어떠한 가치들이 도움이 되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중 워싱턴의 “겸손”은 제게 가장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저는 권력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시키는지, 그리고 권력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공부해 왔습니다.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마음만 먹으면 절대 권력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두 번이나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이후 모든 대통령이 지켜야 할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공과(功過)를 모두 포함해서, 지도자가 되길 원하는 어느 누구라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남았습니다. 특히 스스로 권력을 기꺼이 내려놓은 워싱턴의 겸손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대한 결정이자 중요한 본보기 중 하나로 각인되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에 맞서 승리한 뒤, 워싱턴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를 왕으로 추대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장군이었던 워싱턴은 1783년, 스스로 군 직위를 내려놓기로 결정합니다. 워싱턴의 이러한 뜻을 전해 들은 영국의 조지 3세 국왕은, 만약 워싱턴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의 12월, 그 추운 겨울에 워싱턴이 내린 이 결정은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와 미래를 결정짓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워싱턴의 성장기는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다른 이복형제들처럼 런던에서 정규 교육을 받는 대신 페리 농장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은 그곳에서 근면함의 가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일종의 불안감을 남겼지만, 그 불안감은 곧 지식을 향한 끝없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공부해 나가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년 시절의 워싱턴은 『사교와 대화 예절의 규칙(Rules of Civility & Decent Behaviour in Company and Conversation)』이라는 책에 수록된 110가지 격언을 하나하나 외우며 스스로 ‘신사로서의 덕목’을 익혔고, 이는 평생에 걸쳐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절제력과 예의, 겸손과 외교적 감각에 이르기까지, 훗날 워싱턴의 리더십을 특징짓게 될 많은 자질들이 바로 이 짧은 예절 서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무 살이 되자 워싱턴의 관심은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민병대의 젊은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에는 한 전투에서 소총탄 네 발이 그의 외투를 관통하고,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영국군 정규 장교로 임관되지는 않았습니다.
8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워싱턴은 늘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는 당시 영국군의 지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스털링 소장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통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끌어야지, 억지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워싱턴은 군 고위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하급 병사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며 배워 나갔습니다. 실제로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주 트렌턴을 점령한 후에는 다음 진격 방향에 대해 병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교훈은 이후 지도자들에게도 영감이 되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장군들뿐 아니라 일선 병사들의 목소리까지도 귀 기울여 들으려 했지요. 결국 병력도 크게 열세였고, 승리한 전투보다 패배한 전투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리더십 아래 미국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워싱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성품”이었습니다. 즉 겸손함,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 꺾이지 않는 의지, 그리고 사람들의 신뢰와 충성을 이끌어내는 힘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783년 초, 그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고향이 그리웠으며, 밀린 급여 때문에 분노가 쌓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대륙회의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고, 장교들 사이에서는 반란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3월 15일, 워싱턴은 부대원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전쟁의 대의와 서로에 대한 의무,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고 있던 그 모든 사명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병사들 위에 두지 않으며, 그들과 맺고 있는 개인적인 유대감을 강조하지요.
워싱턴은 역사를 만들기 이전에, 먼저 역사를 깊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권력의 위험성을 경계했던 로마의 지도자들과 장군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뒤 농장으로 돌아갔던 킨키나투스(Lucius Quinctius Cincinnatus)처럼, 워싱턴도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워싱턴은 마음의 평안을 찾고 행복을 누리며, 사랑하는 아내 마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금 맡겨진 사명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신생 공화국이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연합 규약(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연방 정부는 사실상 무력한 상태였습니다. 1787년, 워싱턴은 다시 공직에 복귀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 제정회의(The Constitutional Convention)를 이끌게 됩니다. 워싱턴이 이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국민적 영웅이자 통합의 상징이며, 모든 이들의 신뢰를 받고 있고, 또한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권력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성품”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권력을 남용하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회의를 통해 새로운 헌법이 탄생했고,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직책도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단연 워싱턴이었고,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사례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직책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직책이 자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경제와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연방 정부의 권위를 확립했으며, 권리장전의 통과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이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고, 펜실베이니아 서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며, 또한 매우 뛰어나지만 서로 의견 충돌이 잦았던 내각을 구성하여 훌륭하게 이끌었습니다. 아울러 로드아일랜드의 투로 회당(Touro Synagogue)에서 종교적 관용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고, 국가 사법 체계와 초기 행정 부처를 설립하는 법안에도 서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많은 역사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바로, 워싱턴 자신이 그 임무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일 수도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고, 자신의 앞에서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이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제가 모르는 바를 인정하고, 제가 모르는 것을 아는 참모들을 곁에 두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말입니다.
물론 다른 모든 대통령들처럼, 워싱턴에게도 결점은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군 경력 초기에 전술상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토머스 제퍼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까칠하고 “본래 성미가 급한(naturally irritable)” 면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동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워싱턴 역시 평생 노예를 소유했으며, 한 번도 노예 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뀌었고, 말년에는 노예제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과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은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신이 소유한 노예들을 해방시키게 되지요. 혹자는 죽은 뒤에야 반노예제 입장을 보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사실 죽은 뒤에라도 노예들을 해방시킨 것은 동시대 대부분의 사람들 가운데 드문 일이었고, 가장 진보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는 거의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공적·사적 삶에 드리운 하나의 오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 역시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그 삶과 행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그의 삶은 매우 빼어나고 비범했습니다. 건국 세대는 그를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여겼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미국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이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암울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조지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재단 회장이자 CEO인 더그 브래드번(Doug Bradburn)의 말처럼, 워싱턴의 끈기와 흔들림 없는 낙관, 그리고 궁극적인 지혜는 그의 깊은 정직성과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품은 수많은 시련을 거치면서 그를 끝내 혁명 시대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워싱턴은 “우리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나라에서는 모든 첫 번째가 곧 선례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장기 집권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생생히 남아있던 그 때에, 워싱턴은 대통령직에 재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권력을 붙잡기보다는 다시 한번 더 내려놓음으로써, 미국이 군주제,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체제로 전락하지 않도록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초대 대통령은 대통령직의 성격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워싱턴은 사적인 이익이나 개인적인 야망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올곧았으며, 그런 덕목을 왜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품위와 절제를 잃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대통령직을 존중하되, 그것이 신적인 권력으로 부풀려지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저는 종종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 자리에 앉은 인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직이라는 제도는 국가라는 배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잡아주는 닻과 같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안정성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제정한 헌법의 지혜, 그리고 우리 나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몸소 보여준 겸손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지난 250년 동안 우리를 이끌어 온 이 기반은, 다가올 250년에도 우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어 줄 것입니다.
데일리인사이트 장미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