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오늘 아침, 평화롭던 안식일의 새벽을 찢고 가자지구에서 넘어온 수천 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유린했다. 그것은 결코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의 규범을 정면으로 거부한 야만적 폭력이었다. 단 하루의 기습으로 1,029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는 63명의 어린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대부분 짐승 같은 폭력에 노출되었고, 한 19살 소년은 부모들에게 보란 듯 머리만 잘라서 가져갔다. 납치된 251명 중 62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그들의 시신에는 잔혹한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인간의 언어로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인질을 구출하고 국가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이어진 이스라엘의 전쟁 속에서 1,300여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희생됐다. 7,150개의 가정이 소중한 가족 구성원을 잃었다. 이는 그냥 숫자가 아니다. 2,143명의 부모가 자녀를, 355명의 아내가 남편을, 880명의 자녀가 부모를 잃은 것이다. 3,772명은 형제나 자매를 잃었다. 그 외에도 약 4만 명의 이스라엘 국민이 신체적 장애와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그날 인류를 향해 총
미국의 현대 정치 극단화의 뿌리를 우리는 흔히 1960년대 카운터컬처 운동, 베트남 전쟁, 또는 1994년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의 보수 혁명에서 찾곤 하지만, 더 깊은 역사적 기원은 1950년대 초반에 자리 잡고 있다. 더 프리프레스(The Free Press)의 팟캐스트 프로그램 《스쿨 오브 워(School of War)》에서 최근 진행자 아론 매클린(Aaron MacLean)은 《잊혀진 논쟁: 한국 전쟁과 미국 이념적 분열의 뿌리(The Forgotten Debate: The Korean War and the Roots of America’s Ideological Divisions)》의 저자인 역사학자 데인 J. 캐시(Dane J. Cash)을 초대해 마주 앉았다. 이들은 냉전 시대 최초의 '열전(hot war)'이었던 한국 전쟁이 오늘날의 치열한 대외 개입, 민족주의, 글로벌 리더십을 둘러싼 당파적 갈등의 청사진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조명했다. '자유주의적 합의'라는 신화의 허구성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역사의 핵심 축 중 하나는 냉전 절정기에 민주당과 공화당이 외교 정책과 봉쇄 전략에 대해 통일된 세계관을 공유했다는 이른바 '자유주의
(이 글은 미국 Family Research Council 대표 토니 퍼킨스가 The Washington Stand에 기고한 칼럼을 번역한 것입니다) 민주당 내 사회주의 성향 후보들의 부상에 대해, 하원의장 마이크 존슨(공화당, 루이지애나주)은 "야만인들이 이미 성문 안에 들어와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의회에서 우리가 입헌 공화국의 지위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죽음의 어두운 길로 갈 것인가를 두고 싸우고 있다." 의장은 공연히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다. 위협은 실재한다. 그러나 공화국을 지켜내는 싸움은 궁극적으로 의회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입법 투쟁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한 표가 권력의 균형을 좌우하고, 사회주의 정책이 우리의 자유를 더욱 잠식할지 여부를 결정할 선거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만인들이 이미 성문 안에 들어와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몰아낼 것인가? 의회는 문화를 창조하기보다 문화를 반영한다. 법은 악을 억제할 수는 있으나 미덕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입헌 공화국은 스스로를 다스릴 도덕적 품성을
1년 전 오늘, 우리의 친구 찰리 커크는 유타주 공립 대학교에서 대낮에 공개 토론하던 중 카메라 앞에서 생중계로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는 목에 총을 맞았고, 우리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 모두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를 살해한 범인은 트랜스젠더 퍼리(furry)와 교제 중이던 급진적 동성애자 남성이었다. 범행 동기도 분명했고, 증거도 대단히 명백했다. 그 다음에 일어났어야 할 일 역시 명백했다. 곧 핵심 원칙을 중심으로 한 우파의 정치적 재결집, 좌파의 폭력에 대한 통일 전선, 그리고 어쩌면 종교적 대각성이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기대했던 일들은 대부분 좌절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은, 그 기대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찰리의 아내 에리카 커크를 향한 공격이었다는 점이다. 일부 사람들이 사악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에리카라는 인간을 파멸시키고 TPUSA(Turning Point USA)라는 단체를 해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에리카가 TPUSA를 이끄는 동시에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단순히 슬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TPUSA
2025년 9월 11일, 내 남편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총에 맞아 사망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남편의 차디찬 주검을 확인하고 유타주에서 출발해 피닉스에 착륙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24시간 동안은, 마치 열병 속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이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현관문으로 걸어가는데 가슴을 쥐어짜는 듯헌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사별의 슬픔이란 이런 기분일까? 이틀 전 밤 철리가 아이들과 함께 컵스(Cubs) 야구 경기를 보며 앉아 있던 그 소파에 앉았다. 내 속에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고, 곧 거세게 몰아칠 것임을 직감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날 아침, 밴스 부통령 부인 우샤에게 내가 한 말이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과 비행기를 탔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착륙 15분을 남겨두고 아이들이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다가도, 비행기가 착륙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을 찾고 괜찮아지잖아요? 앞으로의 시간도 그럴 거예요. 딱 다음 15분
[이 글은 2026년 8월 12일에 James Rowell이 Providence 에 기고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필자에 관한 정보는 하단에 있다.] 1945년 8월 6일, 81년 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원자 에너지의 무기화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다만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시급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아인슈타인은 1945년 당시 핵무기의 파괴적 역량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과 악을 향한 인간의 내재적 욕망은 제2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간파했다. 이처럼 인류 본성은 변하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기술의 도래는 그 파괴적 잠재력을 억제하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상응하는 노력을 요구한다. 기독교적이면서도 현실주의적인 목소리가 다른 종교 및 세계관과 조화를 이루어, 오늘날의 핵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를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원칙 1: 핵 위협은 지속되며, 반드시 관리되어야 한다 핵무기의 존재는 핵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상호확증파괴(MAD)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 가능성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평
[이글은 로버트 S. 김이 Providence에 기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그에 관한 정보는 하단에 있다.] 미국 주도의 개신교 선교는 기독교 역사상 한 나라를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변화시킨 사례 중 하나였지만, 한국전쟁이 미국인들의 시선을 한반도로 끌어모을 무렵에는 이미 대중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단기간에 급부상해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고, 미국의 대외정책과 긴밀히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국 사회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가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은, 오늘날 한미 관계의 기원이 된 이 독특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한국 기독교: 미국에서 영감을 받은 혁명적 운동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시기는 수백 년 이어져 온 왕조와 사회 질서가 붕괴해 가던 때였으며,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인물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1880년대 초 전후로 한국은 외세의 군사적 침입을 겪으며 19세기 말 근대적 군사력 앞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절감했고, 1876년에는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마지막 군주 고종은 미국을
견미단을 출발하기 전, 이승만 박사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건국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이승만 박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그 순간에 있었다면, 내가 이승만 박사였다면 과연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견미단에 가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하와이에 착륙하는 순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견미단을 통해 이승만 박사의 발자취를 밟으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다. 더불어 더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겁먹는 것이 아닌 반대로 하나님께 앞으로의 인생을 맡기겠다는 담대한 다짐과 고백을 했다. 견미단을 오기 전에는 스스로 믿음에 대해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냥 외면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니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이승만 박사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이어 나도 하나님께 이승만 박사처럼 쓰임 받고 싶어졌으며 자연스레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를 하다 보니 이승만 박사와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승만 박사가 바라본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결국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견미단은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견미단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한 번의 불합격 통보와 그 뒤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으로 견미단에 함께하게 되었다. 견미단의 일원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일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구하며 이번 견미단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일정이 시작되고 나서 제일 먼저 간 곳은 하와이였다. 하와이에서는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선조들의 발자취들이 많이 담겨있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많은 한인 분들이 직접 생활하시고 또 역사를 써나가셨던 곳들에 가보게 되면서 마음이 경건해졌다. 우리의 조상들이 하와이라는 타지에서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많은 기도와 행동을 쌓으셨다는 것에 정말 많은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조선의 크리스천들이 행동으로 나섰고 그들의 기도가 쌓여서 대한민국이 건국 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거
1883년 7월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미국에 도착한 견미단이 있었다. 이들은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아시아 선교사역에 열정을 갖고 있는 가우처 목사를 만났다. 가우처 목사는 1883 견미단과의 만남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아직 선교사가 파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가우처목사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본부에 조선 땅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며 2천 달러의 헌금과 함께 조선 선교를 향한 마음을 편지로 보내기도 하였다. “뉴욕 감리교 선교본부 파울러 CH.Fower 감독께, 감리교 목사 가우처 John F.Goucher입니다. 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로 가는 열차 안에서 조선에서 온 민영익과 견미사절단을 만났습니다. 그 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동안 가려졌던 이 은둔의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주기 바라며 선교비로 2천 불을 보냅니다. ” - 1883년 11월 5일 가우처 가우처 목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조선 땅에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었다. 이처럼 1883년 견미단을 통해 조선선교의 문이 열렸다. 열차 안에서의 가우처 목사와 1883 견미단의 만남은 단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