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교 없이 살 수 있을까?"...네덜란드 정치인 알리의 기독교 개종

  • 등록 2023.11.17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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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에서 저명한 무신론자로 변신 후 최근 기독교로 회심 밝혀
신을 거부한 공백에는 이성이 아닌 비합리적 '가짜 이유들'이 들어서...

*편집자주

세상에는 다양한 우상들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비단 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각자 마음 속에 우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믿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흔히 여기곤 한다. 과연 사실일까? 이와 관련해 언허드(UnHerd)에 기고된 칼럼 하나를 공유하고자 한다.

 

현대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시대적 물음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과연 인간은 종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에 관해 눈여겨볼 만한 일이 최근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한 때 무슬림이었던 네덜란드 정치인 아얀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가 지난 11일, UnHerd 기고문에서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알리는 어릴 적 무슬림 형제단(가장 오래 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정당)의 영향 아래에서 독실한 무슬림으로 성장했다. 이후, 결혼이 강요되자 난민의 신분으로 네덜란드에 정착한 뒤 무신론에 매력을 느껴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 비판자가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이슬람 단체의 테러 표적도 되었던 그가, 느닷없이 '내가 이제 그리스도인인 이유'라는 제목의 글로 자신의 심경 변화를 밝힌 것이다.

 

아래에서는 알리가 직접 기고한 '내가 이제 그리스도인인 이유'의 일부를 직접 발췌해 왜 그가 기독교로 회심했는지를 소개한다. 이 글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볼드체로 처리된 부분은 역자의 강조 표시이다).

 

2002년, 나는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을 가진 버트런드 러셀의 1927년 강의록을 발견했다. 그걸 읽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이 글을 국립세속협회(National Secualar Society)의 북런던 지부에 전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정확히 반대의 제목으로 에세이를 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1년 전, 나는 여객기를 납치해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공격한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내 종교인 이슬람의 이름으로 그 일을 저질렀다. 그 때 나는 직접 행동에 나서는 쪽은 아니었지만 무슬림이란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정말 그들의 행동을 비난한 것이라면, 나의 종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공격을 정당화한 기저의 원칙은 종교적이었다. 즉, 이교도를 향한 성전, 내지는 '지하드'라는 발상이다.  다른 수많은 무슬림 공동체처럼, 나 또한 그저 그 끔찍한 행위와 결과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했을까?

당시 서구의 많은 저명한 지도자들(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은 오사마 빈라덴과 그 추종자들이 스스로 밝힌 이유와는 다른 동기로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이슬람은 알리바이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무슬림을 의기양양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양인들이 '부인'(denial)으로 후퇴할 기회를 주었다. 종교 전쟁에 직면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실책을 비난하는 편이 더 쉬웠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난 5주간 계속해서 봐왔다. 곤경에 처한 가자 지구의 사람들에 공감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10월 7일의 테러 공격을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러셀의 강의록을 읽었을 때, 스스로의 인지부조화가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종교적 교리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갖는 것, 신에 대한 내 믿음을 버리는 것과 그런 존재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옥의 존재와 영원한 형벌의 위험을 거부할 수 있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다는 러셀의 주장은 내 안에 울림을 주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는 섬뜩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 왔다. 비록 내가 신을 믿는 것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모두 저버렸어도, 지옥불에 대한 그 비이성적인 공포는 더 오래 머물렀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의 결론은 일종의 위안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썩으리라(When I die, I shall rot)."


…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종교 교육을 받아온 사람에게  왜 무신론이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견딜 수 없는 삶이나 자기부정, 타인의 학대로부터 벗어날 간단하면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 간단한 탈출구를 제시해주었다. 그에게 있어, 신 존재의 믿을 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러셀은 종교가 공포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포야말로 그 모든 것의 기반이다. - 미지에 대한 공포, 패배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것이다."

나는 그 공포를 무신론자가 됨으로써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무슬림 형제단의 설교자들과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다른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과 시간을 더 보낼 수록,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무신론자들은 똑똑했으며,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걸까? 왜 이제 나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대답의 일부분은 세계적이다. 서구 문명은 세 가지 다르면서도 관련된 세력의 위협에 놓여 있다. 중국 공산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의 권위주의와 팽창주의, 대규모의 인구를 서구에 대항하게 하는 위협적인 이슬람교의 세계적인 부상, 그리고 다음 세대의 도덕적 정신을 부식시키는 워크(Woke) 이데올로기의 바이러스적인 확산이다.

…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가공할 세력들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무엇이 우리를 연합시키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신은 죽었다!'는 충분하지 않다. '규칙에 기반한 리버럴 국제질서'라는 대답도 마찬가지다. 나는 유일한 받아들일 만한 대답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유산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갈망 안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그 유산은 법치와 민족 국가에서부터 과학, 보건, 교육 기관에까지 놓여 있는 인간 생명, 자유와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정교한 생각과 제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톰 홀랜드(Tom Holland)가 그의 놀라운 저서 도미니언(Dominion)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장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모든 종류의 세속적으로 여겨지는 자유들은 그 뿌리를 기독교에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러셀과 내 무신론자 동료들이 나무들이 아닌 숲을 보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숲이란 유대-기독교 전통 위에 세워진 문명을 뜻한다. 이는 서양의 나쁜 점까지 모두 포함한 이야기다. 기독교 교리의 모순에 대한 러셀의 비판은 진지했으나, 동시에 너무 그 범위가 협소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기독교 국가에서 이미 기독교가 아니거나, 최소한 의심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로 가득 찬 방에서 강의를 했다. 이 모습이 100년 전만 해도 얼마나 독특했는지, 또한 서구 문명이 아닌 곳에서 얼마나 희귀한 지를 생각해보라. 예나 지금이나 무슬림 철학자가 무슬림 국가의 청중들 앞에서 '내가 무슬림이 아닌 이유'라는 제목의 강의를 할 수 있을까? 

…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양심과 언론의 자유가 서구 문명의 가장 큰 이점인 듯 하다. 이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수 세기에 걸친 논쟁의 결과물이다. 그 논쟁이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삶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과학과 이성을 발전시키고, 잔혹함을 줄이고, 미신을 억제하고 제도를 설립한 논쟁을 뜻한다. 이슬람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독단적 단계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정치와는 분리된 종교적인 한정된 역할만 함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계속해서 분명해졌다. 그것은 또한 죄인들을 향한 연민과 믿는 자들을 위한 겸손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가 단지 무신론이 너무 약하고, 우리의 위협적인 적들에게 맞서기에는 분열을 일으키는 교리를 가졌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한다면 나는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위안이 없는 삶이 견딜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 삶은 매우 자기파괴적이다. 무신론은 다음의 간단한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러셀과 다른 행동주의 무신론자들은 신(기독교의 하느님)을 거부하면 우리가 이성과 지적인 인본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교회의 후퇴로 생겨난 공백, 소위 '신의 구멍'은 단지 비합리적인 준종교적 교리의 뒤범벅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는 현대적인 컬트(미신, 사이비)가 혼란스러운 대중들에게 존재와 행위에 대한 겉으로는 그럴싸한 거짓된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먹이로 삼는 세상이다. 그것은 대체로 소수의 피해자나 아마도 파멸을 맞게 될 우리의 행성을 대표해서 미덕을 과시하는 연극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길버트 체스터튼이 남긴 아래의 어록은 이제 예언이 되었다. "신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거나 믿게 된다(When men choose not to believe in God, they do not thereafter believe in nothing, they then become capable of believing in anything)."

이러한 허무주의적 진공 상태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문명적인 수준(civilisational)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들이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 이란에 저항할 수 없다. 파괴되고야 말 문명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워크 이데올로기에도 맞서 싸울 수 없다. 여기 서구에 있는 무슬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에게 틱톡 영상보다는 더 나은 걸 제공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과 보냈던 시간동안 내가 배운 교훈은, 무슬림들을 사로잡고 움직이게 만든 이슬람의 기본적인 텍스트에 들어 있던 통일적인 이야기가 갖는 힘이었다. 우리가 그처럼 유의미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 한, 우리 문명의 침식이 계속될 것으로 우려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약물과 마음챙김의 뉴에이지 혼합물 같은 것들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내가 나를 더 이상 무슬림 배교자가 아닌 무신론을 믿지 않는 자(lapsed atheist)로 판단하는 이유이다. 물론, 아직도 기독교에 대해 배울 점들이 매우 많다. 나는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조금씩 찾아나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의심과 공포의 광야를 지난 나 자신의 긴 여정 중에서, 존재의 문제(challenge of existence)를 다루는 데 무슬림이나 불신이 주는 것보다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데일리인사이트 박형준 기자 |

박형준 기자 hjpark040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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