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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성공이었으나 잊혀진, 미국의 한국 선교

근대 한국의 토대가 되었으나 잊혀버린, 미국 '위대한 세대'의 영적 유산을 다시 뒤돌아보다

[이글은 로버트 S. 김이 Providence에 기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그에 관한 정보는 하단에 있다.]

 

미국 주도의 개신교 선교는 기독교 역사상 한 나라를 가장 빠르고 철저하게 변화시킨 사례 중 하나였지만, 한국전쟁이 미국인들의 시선을 한반도로 끌어모을 무렵에는 이미 대중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단기간에 급부상해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고, 미국의 대외정책과 긴밀히 맞물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국 사회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운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반도가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은, 오늘날 한미 관계의 기원이 된 이 독특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한국 기독교: 미국에서 영감을 받은 혁명적 운동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한 시기는 수백 년 이어져 온 왕조와 사회 질서가 붕괴해 가던 때였으며, 왕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인물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1880년대 초 전후로 한국은 외세의 군사적 침입을 겪으며 19세기 말 근대적 군사력 앞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절감했고, 1876년에는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마지막 군주 고종은 미국을 사실상 유일한 잠재적 동맹으로 인식하고 1882년 미국과 최초의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는 한국을 근대 세계로 이끌 사상의 전달자로서 미국 선교사들을 환영했다. 그 이전에도 유럽에서 온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었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기에 수천 명의 한국인 개종자들이 순교했다. 그러나 1884년,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앨런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전도 허가를 받았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상류층이 중국 문화를 모방하고 그 언어를 배우던, 대다수가 문맹에 가까웠던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은 고유의 언어와 문자에 강한 자부심을 지닌 나라로 탈바꿈했고,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높은 교육 수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교육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1886년 서울의 육영공원—한국 최초의 서구식 관립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입국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공립학교와 교과서를 만들었고, 오랫동안 지식인층이 한문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버려지다시피 했던 15세기 창제 문자 한글로 대중 교육을 시작했다. 1905년 평양에는 최초의 대학인 유니언 크리스천 칼리지가 설립되었고, 1915년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서울에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웠다. 이 학교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 가운데 하나인 연세대학교로 이어진다. 한국 고등교육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지도적 역할은 일본 식민 통치기에도 지속되었으나,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마지막 미국 선교사들이 억류·추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유럽 성직자들이 전한 가톨릭이 아니라, 미국의 지도 아래 세워진 장로교와 감리교 교회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다. 1900년 한국의 기독교인은 약 6만 명(이 중 2만1천 명이 개신교)이었으나, 1910년에는 20만 명을 넘어섰고 그중 약 3분의 2가 개신교인이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번성한 데에는, 초기부터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 신자들이 교회를 주도하도록 계획하고 그들이 신앙을 자국적 맥락 속에서 발전시키도록 장려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1905년 평양에는 한국인을 위한 장로교 신학교가 설립되어 1907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같은 해 평양에서는 이른바 '평양 대부흥'이라 불리는 대규모 회심 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인 신자들이 자신의 죄와 민족적 과오를 자발적으로 고백하고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새로운 신자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열정과 자립성은 1912년 장로교가 자체적으로 중국 선교를 결정하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최초의 성직자가 안수를 받은 지 불과 5년 만에, 과거 자신들이 동경하던 중국 문화권을 향해 선교에 나설 준비를 마친 것이다.

 

미국의 정치사상과 기독교는 1945년 훨씬 이전부터 한국 독립운동의 핵심 요소로 결합되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1905년 이후 시작된 일본의 침략과 식민 통치에 맞선 애국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 당국의 탄압을 우려해 노골적인 지지를 피했지만, 그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는 일본의 체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여들어 조직을 구축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애국지사와 피난민을 끌어들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미국 선교의 영향이 한국 독립운동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3·1운동은 남북한 모두가 독립 투쟁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비폭력 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은 3월 1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북한 체제에 저항하는 비밀 조직 '천리마 민방위' 역시 2019년 3월 1일에 혁명 선언을 발표했다. 3·1운동의 지도부는 33인의 인사로 구성되었고, 당시 인구의 2% 미만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이 16명이나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서울의 승동교회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언은 일본의 식민 지배 종식을 요구했으며,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미국을 비롯한 열강이 한국의 자결권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1919년 3월과 4월 사이 전국에서 1,500건이 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국 및 국제 언론에 상황을 알린 것 외에는 외부의 실질적 지원은 없었다. 일본군은 이를 강경 진압했으며, 한국 측 자료에 따르면 약 7,500명이 사망하고 1만5,000명이 부상했으며 4만6,000명이 체포되었다.

 

대한민국이 그 계승체로 간주하는 임시정부 역시 3·1운동을 계기로 주로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1919년 4월 상하이 등지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약 25년 동안 망명 상태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초대 대통령은 서울의 미국계 학교와 미국의 조지워싱턴·프린스턴·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한 장로교 신자 이승만이었다. 1927년부터 1945년까지는 김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기독교와 서구 사상을 접하고, 탈출 후 수년간 도피 생활을 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김구는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뒤 임시정부를 이끌고 귀국했다.


'위대한 세대' 속으로의 소멸

 

미국 선교는 일본의 탄압 강화와 미일 전쟁으로 그 존재가 종식될 때까지 번성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당국이 학생들에게 천황 숭배를 강요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를 제2계명 위반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세운 학교에서 철수했다. 1940년에는 미 국무부가 전쟁 임박을 경고하자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한국을 떠났고, 남아 있던 이들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1942년 미일 간 민간인 교환을 통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880년대 선교사들의 손자 세대와 20세기 초 지도자들의 아들 세대는 1940년대에 군 복무 연령에 이르러 제2차 세계대전의 방대한 전쟁 노력에 참여했다. 다수는 군에 입대해 육·해·공군 및 해병대원으로 복무했고, 일부는 신설 정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에 합류했다. OSS 국장 윌리엄 도너번은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한국을 일본 제국 내부의 잠재적 '제5열'로 주목했으며, 선교사 자녀들을 다수 영입해 한국인 요원을 모집·침투시키는 작전을 맡겼다. 여기에는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한국인 요원을 훈련시키고 소형 잠수정을 통해 한반도에 투입할 계획이었던 'NAPKO 프로젝트', 그리고 중국 시안에 근거지를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해 망명 군인들을 낙하산 또는 육로로 침투시키려 했던 '이글 프로젝트'가 포함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미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해방된 한반도의 미군정에 한국에 대한 지식을 제공했다. 그들은 점령군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한국 전문가로서 정책 집행에 큰 기여를 했지만, 워싱턴 국무부의 결정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국무부가 미군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미국측의 전략적 실책이 잇따랐고, 임시정부는 김구·이승만 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열되었다. 결국 이승만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는 동안, 북쪽에서는 소련이 김일성 체제의 공산 정권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잊혔지만 사라지지 않은 유산

 

1948년 남한에 수립된 대한민국을 미국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 미국 대중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을 거의 알지 못했고, 미국 정부 역시 이를 공식적으로 기리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 그 기독교적 지적 유산 위에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으며, 20세기 말에는 기독교 인구가 다른 종교를 앞지르게 되었고,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기독교 수용이 사실상 하나의 규범처럼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변화의 기원을 제공한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은 미국 내에서 잊혔거나 애초에 알려지지조차 않았다.

미국 학계는 이러한 망각을 더욱 공고히 했다. 미국 대학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좌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는 한국 기독교의 의미와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민족주의의 민주적 지향을 집요하게 축소하거나 부정해 왔다. 그의 역사관에선 3·1운동이나 기독교 확산과 같은 사건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마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가 서술한 이스라엘 역사와도 같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자국 역사 속 미국의 역할과 선교사들의 공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장로교와 감리교 교회,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에 기원을 둔 대학들은 이러한 유산을 잊지 않았으며, 호머 헐버트 기념사업회와 같은 단체들은 한국의 생존과 근대화에 기여한 미국인들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오늘날 북핵 문제와 변화하는 한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미국인들은 한국 역사에서 자국 선교사들이 수행한 역할과 그 의미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로버트 S. 김은 『프로젝트 이글: 제2차 세계대전 속 북조선의 미국인 기독교인들(Project Eagle: The American Christians of North Korea in World War II)』(포토맥 북스, 2017)의 저자이며, 법률 및 외교 분야에서 약 20년에 걸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뉴욕의 한 로펌에서 국제 금융법을 담당했으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재무부에서 금융 규제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주러시아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2009~2010년에는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재무부 부참사관으로 재직했다.

 

데일리인사이트 성예솔 기자 번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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