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싱어 프린스턴 대학교 생명윤리학 명예교수는 공리주의자이자 상당히 강경한 실천윤리학자로 유명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싱어는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낙태 및 영아살해, 장애인과 노인 등의 안락사를 지지하며, 동물에 관해서도 인간성이 아니라 '인격'을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싱어의 이러한 논쟁적인 주장들 때문일까, 필자는 오늘 내셔널리뷰에서 싱어의 주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읽게 되었다. 해당 글의 요지는 "싱어의 주장이 서구 사회를 (생명권을 중시하는 문화보다는) 자살을 찬성하는 문화로 퇴보하도록 만들 것이며, 이러한 사고방식의 희생자는 노인, 장애인, 중증질환자 들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싱어는 노인 및 중증장애인들의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는 의견을 내비친 적 있다.
이러한 논쟁들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가 머릿 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국민연금을 포함한 다양한 복지 제도에 관한 주장들이 아닐까 싶다. 현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갈등과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 정치적 갈등을 제외한다면 많은 부분이 현재 국가가 나서서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둘러싼 싸움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논쟁들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가 운영되는 데 있어서 응당 필요한 논쟁들이고 실제로도 '약자'를 내세운 정책들이 실제 사회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약자 계층들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권 집단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일은 부지기수한 일이다.
당장 국민연금만 하더라도 해당 정책의 최대 수혜자들은 실제 경제적 빈곤층에 해당하는 노인들이 아니라 국민연금에 장기적으로 가입할 수 있었던 상위중산계층이다. 또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주장하던 탈시설 주장은 전문가들이나 시설의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계층들의 고충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강제로 탈시설을 당한 뒤 욕창으로 사망한 중증 장애인이 존재할 정도다)이며,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남녀동수 내각이나 여성 단수공천 역시 빈곤층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여성들의 출세 수단으로나 악용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싱어는 공리주의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낙태, 안락사 등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와는 좀 결이 다르겠으나 현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다. 가령 노인부양 문제에 있어 청년 세대의 부담이 크니 노인들의 안락사를 허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와 같다. (여기서 노인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적극적 안락사 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낳는 데, 대표적인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하나는 개인이 죽을 자유가 아니라 '어떤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이 죽을 권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가령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기 힘들어 부모에게 안락사를 권유한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일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한국 형법상으로는 이를 자살교사방조죄로 처벌하고 있다.)
더군다나 종교적 논쟁을 떠나서 학계에서는 안락사 남용의 위험성에 관하여 상당히 경각심을 가지고 있고, 안락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주위의 눈치를 받고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요컨데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적극적 안락사를 선택하여 죽는 사례'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안락사라는 발상 자체가 우생학과 뗄레야 뗄 수 없다. 실제로 과거 일본에서는 두 명의 의사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안락사 약물을 투약한 사태가 벌어졌는데, 해당 의사들은 고령자들을 비하하는 '우생학적 사상'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우생학은 모든 사람들이 응당 누려야 할 기본권(자유권과 생명권)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게 된다는 문제가 생기며, 더 나아가서는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문제다.
멸시 받는 대상이라고 해서 죽어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그것이 국가에 의해서는 더더욱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안락사의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나서서 죽음을 장려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우생학의 문제점과 궤를 같이한다. 생각해보건데 노인, 장애인 등에 관하여 아무리 비판적인 입장을 내비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주장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우리가 국민연금 등 복지제도에 있어서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미래세대가 국가에 의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지 "청년세대를 위해 노인세대를 포함해 복지혜택을 수급받는 계층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특정 계층을 향한 비판을 넘어서서 "노인들이 죽어야 한다"는 냉소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한다. 필자도 현재 청년세대의 일원으로서 현 국민연금 제도를 포함한 많은 복지제도들이 응당 필요한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특정 계층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는 것에 분노한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동료 시민들에게 칼을 들이민다면 그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성세대가 자라나는 미래세대를 착취하는 죄의 고리를 끊고, 합당한 방식으로 구조적 개혁을 외쳐야 한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막연한 분노감을 표출하는 것은 그 순간에는 통쾌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괴물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마저 괴물로 변해버린다면 미래는 없을 것이다.
데일리인사이트 정성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