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 무신론의 논리적 종착지

  • 등록 2024.02.06 05: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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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권'이라는 개념은 주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라는 '천부인권설'에 기반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설정한 도덕 원칙을 인정하고 그를 기반으로 사회 시스템을 움직인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종교(하나님)를 일종의 허구의 상징 체계로 설명한다. 과연 그러한 시각이 옳은 것일까? 인텔렉추얼 테이크아웃의 쿠르트 말부르크(Kurt Mahlburg)가 작성한 칼럼에서는 하라리의 무신론적 세계관의 위험성을 근거를 들어 지적하고 있다.

 

만약 허무주의가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저서 '사피엔스'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는 인권을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인권은 천국과 같고 하나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퍼뜨린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죠. 매우 멋진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사실이 아니죠."

 

상술한 인용문은 거의 10년 전 하라리가 TED 강연에서 이야기한 발언이다. 그러나 이 강연은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재조명 받고 있다. 영상의 조회수는 수백만 건에 달했으며, 댓글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라리가 강연에서 말한 발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아마 많은 법적 제도들은 인권에 대해 이런 생각이나 믿음에 기반할 겁니다. 그런데 인권은 천국과 같고 하나님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퍼뜨린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죠. 매우 멋진 이야기일 수 있고 그것을 믿고 싶겠죠. 그러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사실이 아니죠. 

 

그건 생물학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아요.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권리는 없습니다. 사람을 데려가서 해부해보고 속을 들여다보세요. 거기서 피, 심장, 폐, 그리고 신장은 찾을 수 있어도 권리는 찾을 수 없죠. 권리를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 속입니다.

 

 

하라리의 강연 전체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의 TED 강연이나 허무주의적 세계관에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하라리는 신과 인권이 모두 허구라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확신에 가득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하라리는 우리에게 그의 말을 믿으라고 요구하면서도 그 주장에 대한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이러한 세계관의 위험하고 허무주의적인 논리의 종착지를 드러내고 있다. 즉, 신이나 초월적인 힘이 없다면, 인간 대다수의 국가가 동의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기준마저도 무효라는 것이다. 더 높은 권력이나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없는 세상에서는 어떤 도덕적 악도 궁극적으로 선을 넘은 행위가 되지 않는다. 테러, 소아성애, 살인 등 모든 악한 행위가 악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존재와 인권이 허구의 개념이라면,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 이성, 사랑 등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하라리는 '당위의 문제'라고 불리는 곤경에 빠졌다. 그리고 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세속철학의 지속적인 문제는 더 높은 권력이 없으면 우리 주변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에 있어 한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도덕의 영역에서 인간 문화를 초월하는 도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성향이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옮겨갈 때, 우리는 많은 끔찍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덕적 구속 없이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편리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행위로부터 사람이나 문명을 막을 힘은 없다.

 

많은 세속 철학자들이 이것을 문제로 여기는 반면, 하라리는 이를 마치 인간이 노력 끝에 성취한 전리품처럼 선전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하라리의 지적 선조들 역시 그러했다. 최근 역사에서 20세기의 공포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엇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권이 유신론적이지 않고 세속적이라는 주장은 무슨 맥락일까? 사실 인권은 세계인권선언이나 이와 유사한 문건에 명시된 것처럼 분명히 기독교적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노트르담 대학의 이안 벤슨(Iain Benson)은 "20세기에 개발되고 성문화된 인권 개념의 주요 지지자들은 프랑스의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과 레바논의 찰스 말리크(Charles Malik) 같은 기독교인들이었다"고 설명한다.

 

'서방세계의 진화'(The Evolution of the West)의 저자 닉 스펜서(Nick Spencer)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한다. 그는 "인권선언이 어떤 종교적 교리를 명시적으로 끌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비종교적이지만, 만약 뚜껑을 열어보면 그 속에 엄청나게 많은 기독교적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무신론자인 하라리는 아마 무신론이나 허무주의가 우리를 인권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며 기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정반대다. 이는 인간사회가 조금이라도 작동하려면, 즉 국가들이 스스로와 서로를 어떤 도덕적 틀에 고정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만든 도덕 체계를 부흥시킬 것인가, 아니면 삶과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굴복할 것인가?

 

데일리인사이트 정성민 기자 |

정성민 기자 luwie20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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