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도 발전도 없는 美 철강 산업의 역사

  • 등록 2024.01.15 05: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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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스틸은 일본 철강 산업의 일본제철과 합병을 발표했다. 합병 하기 직전, US 스틸의 시가총액은 80억달러 수준이었고 포춘500에 들지도 못하였다. (690위 수준으로 텍사스 로드하우스의 레스토랑체인 브랜드에 근소한 차이로 밀렸다.) 근소하지만 명백하게 US 스틸은 시장 점유율과 중요한 위치를 잃어갔다.

 

1901년에 기업이 설립되었을 때, US 스틸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고 2/3가량의 미국의 철강을 생산했었다. 오늘날 US 스틸은 미국의 철강 생산량의 12%만 책임지고, 1955년 당시보다 1/3가량의 철만 생산하고 있다. 또한 종업원은 온라인 애견소비점인 Chewy와 같은 수준만 보유하고 있다. US 스틸의 사례는 쇠퇴한 미국 철강 산업의 예를 잘 대표한다.

 

초기 미국의 철강산업

20세기초의 미국의 철강산업은 유럽의 철강산업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효율적인 산업이 되었다.  앤드류 카네기의 카네기 철강은 철강제조능력의 발전과 시장점유율 확장에 몰두하고 있었고 1870년부터 1896년 사이에 서서히 가격을 80%이상 인하하였다.

 

가격은 성공의 핵심요소였다. 철강생산산업은 매우 큰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산업이었고 공장의 용광로와 베서머 변환기가 크고 중단없이 가동될수록 철강생산비용은 저렴하여졌다. 시설로 인한 높은 고정비는 철강 생산자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공장을 가동하고, 시장의 수요가 적을 때는 가격을 겨우 한계비용보다 조금 높은 수준에서 책정하게 하였다. 이는 선순환을 불러와 지속적인 공급능력과 낮은 가격을 통한 경쟁우위를 갖추고 시설투자로도 이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업우위의 공고화에 대한 열망도 커져갔다.  1900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의 기업가들과 은행가들의 만남은 합병의 기폭제가 되었다. 카네기 철강산업의 찰스 슈왑(Chales Schwab)은 합병을 통한 산업의 정상화와 효율화를 역설하였다. 4개월 후, 슈왑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J.P. 모건의 주최아래, 카네기 철강과 연방 철강 그리고 내셔널 스틸, 아메리칸 시트 스틸, 아메리칸 스틸 후프등이 합병하여 거대 철강기업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철강 기업의 정체는 바로 US 스틸로,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최초의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기업이었고 16만8000명의 고용자를 확보하고 900만톤 가까운 철강을 매년 생산하며 60%의 이상의 미국의 철강을 책임졌다. US 스틸은 계속 커져서 1971년에는 2번째로 큰 기업인 AT&T보다 3배 규모로 커졌고 스탠다드오일이 쪼개질 당시보다 7배나 컸다.

 

치열한 경쟁의 시기를 보내던 미국의 철강산업은 US 스틸이 등장함에 따라 마침표를 찍었다. 최고경영자인 앨버트 개리(Judge Elberty Gary)는 근본있는 보수주의 경영자였고 안정을 혼돈과 치열한 경쟁의 산업계에 가져왔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전의 카네기 철강등의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가격을 낮춰서 더 큰 시장 점유율을 봑보하고 경쟁우위를 확보했었던 것과는 달리 개리는 비교적 높은 가격을 설정하고 철강에 대한 수요가 줄어듬에도 불구하고 가격을 더욱  높여갔다. 비록 규모의 경제가 생산에 가격우위를 주었지만 이는 소비자의 후생보다는 기업의 이윤으로 돌아갔다. 많은 경쟁에 익숙해져있던 전직 카네기 철강의 직원과 고위직들은 개리의 전략에 회의감을 느끼고 다른 철강 기업으로 이직하였다.

 

1902년에 당시, 공정과정을 단순화시킨 '유니버셜 빔 밀'(Universal Beam Mill)이 발명된다. 발명자는 자신의 발명품을 US 스틸에 제안하였으나  재정 위원회에 의하여 거절당하였다. 결국 해당 발명품은 카네기 철강의 전 회장인 슈왑이 경영하는 베들레헴 철강에서 처음으로 생산하게되었다. 신제품과 함께 성장하는 철강 생산 시장에서 줄어드는 시장점유율을 맞딱드리게 된 US 스틸은 결국 베들레헴으로부터 1926년에 라이센스권리를 사오게 되었다.

 

실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1920년에는 전기저항용접을 이용하여 큰 직경의 파이프를 만드는 공법이 발명되었다.  US 스틸에게 처음 기회가 왔으나, 또 기회를 놓친 US 스틸은 몇년 후에 다른 경쟁자의 성공 이후에야  이를 받아들였다. 비슷한 시기에 생산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철판 연속압연이 발명되었다. US 스틸은 1902년에 이를 이미 발명하였으나 기술을 도입하지 않았었고, 다시 한번 다른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라이센스료를 지급했다.보수적인 문화와 전 카네기 철강 운영진들의 빈자리는 US 스틸이 시장점유율을 잃고 기업 경쟁력을 상실하게 하였다.  1941년의 US 스틸의 철강 생산량은 연간 3000만톤으로 창설 당시보다 3배 증가하였으나 시장점유율은 60%에서 35%로 하락하였다.

 

2 세계대전 이후의 US 스틸

전쟁 중에 미국의 철강 산업은 다른 국가의 철강 산업이 완전히 폐허가 되는 동안에 3배 이상 성장하였으나 US 스틸을 포함한 미국의 철강 산업 기업들은 경쟁자가 없었고 조금씩 안주했다.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매년 7%씩 가격은 상승했다.) 전후 막대한 량의 수요를 감당하기위하여  그 당시 최신설비를 사용하여 설비를 확장한다.  '개방형 난로'는  철과 액체선철을 한 곳에 모아 재생열교환기로 녹인다. 1954년에, 90%이상의 미국의 철 생산이 개방형 난로 용광로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전기 아크로와 베세머 변환기가 혼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195년, 신기술인 기본산소제강(BOF)이 등장하는데 BOF는 철강의 대량 생산을 위해 이용했던 초기의 베세머 변환기를 다시 꺼내들었다. 베세머변환기는 공기를 액체선철의 아래에 불어넣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는데, BOF는 순수 산소를 선철위로 불어넣었다.  BOF는 베세머 변환기의 단점(질소취성, 제한적 광석이용)들을 제거함으로써 장점(철에서 강철로 변환되는 시간, 고효율,저비용,낮은 설치비용)들만 가져갔다.

 

1952년, 첫 상업적 BOF가 오스트리아에 설치되었고,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대되나 US Steel은  신기술 도입에 머뭇거렸다. 아직 사용기한이 많이 남은 비싼 개방형 난로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고 1964년이 되서야 US 스틸은 후발주자로서 BOF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에 카이저 철강은 생산량의 43%를 BOF를 이용하여 생산하고 있었다.

 

유사한 문제가 개별적인 잉곳 대신에 연속적인 철 슬라브를 생산하여야해서 압연을 제거해야하는 연속 주조 기술에서도 발생했다.  미국 기업들은 연속 주조 기술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하였으나 다른 나라보다 도입에서 늦었다. 1975년에 미국은 9%만이 연속 주조 기술로 생산된 반면에 일본은 31%, 서독은 24%로 크게 뒤쳐졌다. 

 

1960년대에  일본 등의 해외 철강 공급자들은 빠르게 BOF, 연속 주조 기술 등의 신식 철강 기술을 도입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본 철강 기업의 투입요소비용(광석, 노동, 원료탄 등)이 미국의 절반 수준이었다. 1955년에서 1970년 사이 미국의 철강 수입량은 생산량의 2%미만에서 15% 이상으로 10배 이상 늘었고 가파른 상승세였다. 미국의 철강 기업들은 해외 기업들의 도전에 대해 기술적인 발전이 아니라 불공정한 무역을 내세워 정부에 기대었다.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압박아래 유럽과 일본의 철강 생산자들은 스스로 미국에 철강 수출을 제한했다. 

 

철강 위기와 미니밀의 부상

당시까지 철강은 거대하고 집중화된 철강시설에서 생산되었다. 용광로에서 철광석은 선철로 변하고 개방형 난로나 염기성 산소 용광로를 거쳐서 강철로 변한다. 강철은 잉곳이나 슬라브로 주조된 다음에 와이어,막대,플레이트,빔,시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미니밀이라는 새로운 철강 생산 시설이 등장했다. 미니밀은 광석이 아니라 전기 아크 용광로에서 다시 녹인 고철을 재료로 철강을 생산하였다. 광석을 선철로 만드는 고로를 생략함으로써 미니밀은 거대 철강생산시설보다 1톤 당 1/10의 가격으로 저렴해지고 작아졌다.  또한 고철은 철을 개방형 난로보다 비교적 적게 사용하는 BOF 기술 덕분에 충분한 량이 있었다.

 

고철은 구리 등의 분리하기 어려운 다른 금속과 섞여 있었기에 BOF 기술로 생산되는 철보다 질적으로 좋지 못했다. 초기에 미니밀 기술로 생산된 철강은 질이 중요하지 않은 콘크리트 보충 철강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니밀 기술이 점점 발전됨에 따라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서 1994년 사이에 대형 철강 생산자의 생산 능력은 50%이상 하락한 반면에 미니밀의 생산능력은 360%이상 증가하였고 이는 미국 철강 생산량의 30%에 달하였다.

 

1974년에서 1994년 사이의 미니밀

1980년대 초기 US Steel은 시장 점유율은 20%로 떨어졌고 가정의 미니밀이나 다른 저가 해외 생산자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다. 한 때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 있는 철강 기업이었으나 수익성에서마저도 열세였다.

 

US 스틸은 만 명이 넘는 고용자를 해고하고 공장들의 문을 닫았다. 1979년에 17만1000명 이었던 고용자 수는 1995년에 2만1000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US 스틸은 철광업, 운송업,다리 건설업을 포기하고 미니밀과의 경쟁에서 열세인 철강 시장에서 물러나서 미니밀이 생산하기 어려운 철강 시트 제품에 집중하고 몇몇의 거대 대형 철강시설에서의 생산에 집중했다. 1985년에 이르러 US 스틸은 150여개 이상의 시설을 폐쇄하고 1998년까지 1973년에 비해 71%이상의 철강 생산 시설을 축소했다.감축이후 생산성은 다시 증가했고 US 스틸은 미니밀과의 경쟁에서는 열세였지만 다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형 철강 생산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수입량이 증가하고 미니밀이 시장 점유율을 잠식시킴에도 US 스틸은 다른 경쟁자들이 무너질 때 버티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BOF 기술을 도입하며 US 스틸에게 위협을 가한 카이저 철강은 18분기의 손실이후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오랜 라이벌인 베들레헴 철강을 포함하여 30개의 철강 기업이 파산을 신청했다.

 

그러나 US 스틸은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기에는 부족했다. US 스틸은 2020년에 미니밀 기업을 인수하고 미니멀시설을 앨리바마에 건설할 때 까지 미니밀을 도입하지 않았다. 이 때 누코와 같은 기업들은 슬라브 주조기술과 같은 기술을 빨리 도입하며 US 스틸을 앞섰다.

 

오늘날, 미국 철강산업에서 미니밀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많은 량의 철강이 전기 아크 용광로에 의해 생산되고 미니밀 기업인 누코는 2015년에 US 스틸의 생산량을 넘어선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가장 큰 철강 생산 기업이다.

 

결론

US 스틸은 창설부터 지금까지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부터 철강 산업의 위기에 대한 보수적인 대응으로서 창설되었고 이는 초기 회사의 방향과 문화로 이어졌다. 

 

US 스틸의 큰 규모는 관리하기 힘들게 만들었고 지난 100년 간의 주요 기술발전에 있어서 기본 산소 용광로 부터 미니밀까지 뒤쳐졌었다. US 스틸이 기술혁신을 이룩하려 할 때 그들은 실수를 반복했다. 생산과정에서의 연속 압연 기술의 경우, 너무 빨리 포기를 했으며 다른 기술의 경우 기술 개발에 지나치 많이 시간을 쏟았다. 예를 들어 1950년, US 스틸은 BOF를 대체하기 위해 공기를 옆에서 불어오게 하는 기술등을 이미 오래 전에 다른 기업들을 대체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서도 계속 몰두했다. 1970년대에는 Q-BOP이라 불리는 또 다른 BOF를 대체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나서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20세기의 어느 기술도 US 스틸로 부터 개발되지 않는다.

 

데일리인사이트 김성현 기자 |

김성현 기자 ironwar0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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